
비가 오면 약속을 하나쯤 미루고 창가에 앉습니다. 같은 책이어도 빗소리가 깔린 날에는 문장이 다르게 들어와요. 오늘은 그 오후에 반복하는 작은 의식들을 적어 둡니다.
자리부터 만들기
창 쪽으로 의자를 반 뼘 돌려 놓고, 무릎에 담요를 덮습니다. 불은 켜지 않고 스탠드만 둡니다. 형광등을 켜면 빗소리가 한 겹 멀어지는 기분[1]이 들어서요.
읽는 순서
- 첫 한 시간: 이미 읽은 책에서 좋았던 부분 다시 읽기
- 두 번째 시간: 아직 펴지 않은 책 첫 장만 읽어 보기
- 마지막: 아무것도 읽지 않고 창만 보기
순서는 바꿔도 됩니다
그날 기분에 따라 앞뒤를 바꿔도 괜찮아요. 다만 마지막의 '아무것도 읽지 않기'만은 꼭 남겨 둡니다.

비 오는 날의 규칙
휴대전화는 다른 방에. 알림이 울리는 순간 빗소리가 배경으로 밀려납니다. 대신 책 옆에 작은 노트를 두고, 떠오른 문장만 한 줄씩 적어요.


비가 그치면
비가 그치면 읽던 쪽에 책갈피를 꽂고 창을 조금 엽니다. 젖은 땅 냄새가 들어오면 오후가 끝났다는 신호예요.
젖은 땅 냄새가 들어오면 오후가 끝났다는 신호예요.
그때 적어 둔 문장 중 하나가 다음 글의 첫 줄이 되기도 합니다.
각주
- 소리가 실제로 작아지는 것은 아니고, 밝은 불빛이 주의를 바깥으로 돌리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. ↩

